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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케팅 격세지감

2019. 05. 27

Writer 정준화 : 디지털 기획자. 틈나는 대로 영화, TV, 책, 전시 등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쓴다.

21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신문 광고가 영화에 대한 정보를 구할 중요한 채널이던 시절이 있었다. 유튜브도 구글도 없던 시기의 어린 관객은 호기심을 해소할 방법이 많지 않았다. 소수의 영화 전문 잡지가 있기는 했지만 냉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용돈이 넉넉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신문이 도착하면 1면의 주요 기사 따위는 훌쩍 건너뛰고 영화 광고란부터 찾았다. 새롭게 업데이트된 개봉 예정작을 발견하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빼곡하게 적힌 홍보 문구들을 한 자 한 자 열심히 읽어내려 갔다.

불랙 후라이데이 포스터

돌이켜 보면 정독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수다스럽고 호들갑의 스케일이 거대한 와중에 실용적인 정보는 전무한 콘텐츠였다. 1984년작 <불랙 ? 후라이데이>의 지면 광고에서 유의미한 내용을 꼽자면… 상영 시간표 정도? 뭉치면 얼어붙고 흩어져도 졸도한다면 뭘 어째야 하는 걸까? 굳이 돈까지 내면서 번거롭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나? 카피에 의하면 이 영화는 여성의 세포 3만 개를 죽여서 체중을 감량시킨다고 한다. 저 쓸데없이 구체적인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걸까?

밀레니엄 베이비가 성인이 될 정도로 시간이 흐른 지금, 신문 광고에서 개봉작 소식을 얻는 영화팬은 아예 멸종된 상태다. 하키 마스크를 쓴 살인마 제이슨이 영상으로 묶고 소리로 때리고 분위기로 기절시켜서는 물론 아니고, 홍보의 무게 중심이 온라인으로 완전히 이동했기 때문이다. 영화 마케터들은 기발한 호들갑으로 버무린 카피를 지면에 얹는 대신 포털 사이트에 배너를 걸고, SNS 이벤트를 기획하고, 작품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는 웹사이트를 제작하기도 한다. 특히 티저 마이크로사이트들의 경우,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 안에서 최신의 웹 트렌드를 구현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콘텐츠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들 중에서 눈에 띄었던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패트리샤의 일기

패트리샤의 일기 https://patriciasdiary.com (모바일 전용)

현재 한국 극장에서 상영 중인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1977년작 호러 고전을 리메이크한 프로젝트다. 결과적으로 원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됐지만 미국인 댄서가 마녀들이 운영하는 유럽의 댄스 시어터에 입단하게 된다는 기본 설정만큼은 동일하다. 2018년작에서 클로이 그레이스 모레츠가 연기한 패트리샤는 영화의 첫 번째 희생자다. 정신과 상담의인 클렘페러 박사는 그녀가 남긴 일기장을 단서로 삼아 무용단의 실체를 추적한다. 영화 홍보를 위해 제작된 모바일 사이트 ‘패트리샤의 일기’는 극 중에서 얼핏 언급됐던 노트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여준다. 일기장 곳곳에 숨겨진 붉은 표식들을 길게 누르면 불길한 주술이 시작된다.

2. B.P.R.D.에 지원하세요

헬보이 https://bprd.global (모바일 전용)

마이크 미뇰라의 그래픽 노블 <헬보이>는 이미 2004년과 2008년에도 기예르모 델 토로에 의해 두 편의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닐 마샬이 연출을 맡은 2019년의 <헬보이>는 시리즈의 불판을 가는 리부트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하지만 지난 4월에 마침내 공개된 작품은 기대를 한참 밑도는 결과물이었다. 평단과 관객의 혹평 속에 흥행에서도 참패했기 때문에 속편의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해졌다.

개봉 전 론칭한 <헬보이>의 이벤트 웹사이트는 2019년작이 남긴 몇 안 되는 성취 중 하나다. 콘텐츠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하나는 헬보이와의 화상 전화 인터뷰다. 사전 이메일 등록을 통해 지원 자격을 얻었다면 B.P.R.D.(Bureau of Paranormal Research & Defense 초자연 현상 연구 방위국)의 인턴십 면접을 치를 수 있다. 일종의 음성챗봇 기술을 활용한 기획이다. 다른 하나는 주요 캐릭터들을 소개한 아카이브 섹션이다. 비밀문서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인터랙티브한 UI/UX로 구현했다. 이 디지털 마케팅은 오히려 영화 본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바일기기로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카즈월럽 피시 앤 칩스(Codswallop Fish & Chips)라는 외식업체의 로고를 마주하게 된다. 당황하지 말 것. B.P.R.D.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 기업 중 하나다.

3. 마고를 찾습니다

서치 http://www.findmargot.com (모바일 전용)

아니쉬 차간티의 <서치>는 실종된 딸의 행방을 쫓는 아버지의 추적극을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중계하는 독특한 형식의 스릴러다. 2018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센세이션에 가까운 입소문을 탔고, 정식 개봉 후 흥행에서도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뒀다. 홍보용으로 제작된 웹사이트는 접속자들에게 주인공 데이비드의 스마트폰을 직접 들여다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극중 인물들과의 대화, 사건의 개요를 설명한 뉴스, 미스터리의 단서가 될 만한 이미지 같은 자료를 이메일, 문자 메시지, 사진 앨범 등의 각 메뉴에 꼼꼼하게 채워 넣었다. 영화의 콘셉트와 유기적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스마트폰을 뒤지는 듯한 떳떳하지 못한 즐거움까지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4. 당신 인생의 패브릭

 당신 인생의 패브릭 https://aghost.store

A24는 양질의 라인업과 영리한 브랜딩으로 주목받고 있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제작사 겸 배급사다. <룸> <문라이트> <레이디버드> <유전> 등의 화제작이 모두 이 회사의 손을 거쳐 관객들과 만났다. 독립 영화 프로젝트가 대부분인 만큼 이들은 마케팅에서도 물량 공세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승부수를 두는 편이다. <유전> 개봉 당시에는 기괴한 취향을 지닌 10대 캐릭터 찰리가 만든 섬뜩한 인형들을 온라인 핸드메이드 오픈마켓인 엣시(etsy.com)에서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또한 관련 굿즈로 ‘사악한 할머니 달력(Evil Grandmas 2019 Calendar)’을 제작해 현재까지 A24 홈페이지에서 판매 중이기도 하다. <유전>의 결말을 이미 안다면 이런 제품이 기획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2017년 말에 개봉됐던 데이비드 로워리의 <고스트 스토리> 역시 A24의 작품이다. 작곡가인 C(케이시 애플렉)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자 연인이었던 M(루니 마라)은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남자는 유령이 되어 둘이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가 다른 삶을 찾아 떠나가고 긴 세월에 걸쳐 새로운 사람들이 들고나는 동안에도 그는 이 공간을 묵묵하게 지킨다. 이 느리고 고요하고 시적인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건 유령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러닝타임의 팔 할 정도를 케이시 애플렉은 눈구멍이 두 개 나 있는 침대 시트를 뒤집어쓴 채로 소화한다. 얼핏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아이디어지만 결과물은 놀랍도록 효과적이고 아름답다.

마케팅팀은 영화의 홍보를 위해 유령이 뒤집어쓸 시트를 파는 가상의 온라인몰을 열었다. 구입을 하려면 돈 대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약 8분가량 지정된 메뉴를 누르고 있어야 구매 페이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 화면에는 영화 속 장면과 함께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이는 애틋한 메시지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약속된 시간을 소진하고 나면 어떤 결과와 마주하게 된다. 이미 작품을 본 사람들에게 더 긴 여운을 남길 웹사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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