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dy.

BLOG > LIVING

LIVING

서재 분가시키기

어느 애서가가 터득한 정리법

2019. 05. 13

새로운 계절을 맞아 미뤄뒀던 숙제를 해치우기로 했다.
책으로 포화 상태가 된 서가의 재정비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Writer 정준화 : 디지털 기획자. 틈나는 대로 영화, TV, 책, 전시 등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쓴다.

책모음

앤 페디먼의 에세이 <서재 결혼시키기>는 책에 바치는 애틋하면서도 유쾌한 애정 고백이다. 평생을 책벌레로 살다가 또 다른 책벌레를 만나 결혼한 저자는 함께 산 지 6년째 되는 시점에서야 가까스로 남편과 서가를 합칠 결심을 한다. 겹치는 목록에서 누구의 책을 남기거나 버릴지 결정하느라 부부는 팽팽한 설전을 벌이게 된다. 애서가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갈등일 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사랑은 종종 집착에 가까워서 말끔하게 정리되는 경우가 드물다. 어떤 사람들은 책꽂이가 차고 넘치는 지경에 이르러도 몇십 권쯤 내다 버릴 생각을 하는 대신, 다시 들춰볼 가능성도 희박한 무더기로 서재 바닥에 피사의 사탑을 일곱 개쯤 세워둔 채 지내곤 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그 ‘어떤 사람’이 바로 나였다. 서가가 토해낸 책이 바닥까지 흘러넘쳐 있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평생의 하우스 메이트는 만나기 전이라 아직 서재를 결혼시킬 계획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 전에 서재 일부를 분가부터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극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나보다 냉정한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까지 론칭시키며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 출신의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처럼. 일단 그의 조언이 단정하게 기록된 지침서인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을 (가지고 있는 책도 버려야 할 상황이기 때문에 e북으로) 구입했다. 읽고 난 뒤, 곤도 마리에는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부터 했다. 이 정리 컨설턴트는 장서의 수량을 늘 30권 정도로 유지한다고 한다. 탐욕스러운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경지다. 채소 섭취를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가 출가를 권유받은 기분이었다.

넷플릭스의 <곤도 마리에 :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예고편

결국 현실적인 절충안을 마련했다. 나의 소박한 목표는 어느 자리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파악이 가능할 정도까지만 서재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책꽂이의 공간이 모자라 칸칸이 겹쳐 쌓아 올린 분량 만큼을 어떻게든 처분해야 했다. 화창하던 휴일 하루를 꼬박 투자한 끝에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물론 여전히 집에는 서른 권의 열 몇 배쯤 되는 책이 남아 있다. 그래도 멀쩡히 구입해둔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집을 찾는 데 끝내 실패해서, 할 수 없이 친구에게 빌려 읽어야 했던 사태 같은 건 한동안 반복되지 않을 듯하다. 최근의 경험을 통해 배운 몇 가지 교훈을 나열해 봤다. 일부는 곤마리 정리법에 대한 후기이고, 나머지 일부는 나름대로 터득한 사소한 노하우 정도가 되겠다.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부터 조성하라.

곤도 마리에의 조언 중 특히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는 이거다. ‘책을 모조리 꺼내 한곳에 모은다.’ 그는 한 권씩 직접 만져봐야 나를 설레게 하는 책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이 지침에 동의하게 된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일단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저질러 놓아야 어떻게든 끝을 볼 수가 있다. 서재와 침실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죄다 거실 바닥으로 옮기고 났더니 본격적인 정리에 돌입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설레고 말고를 따질 여력도 없어서, 타노스의 건틀렛을 빌릴 수 있었다면 당장 손가락을 튕겨서 무작위로 절반을 날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이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책을 솎아내는 작업이 좀 더 과감해졌다.

책을 전부 꺼내 한 곳에 서재 정리의 첫 단계. 가지고 있는 책을 전부 꺼내 한 곳에 모은다.

직관적으로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서재를 만들 것.

남길 책을 결정했다면 책장에 돌려놓기 전, 효과적인 분류법부터 재고해야 한다. 기준으로 삼을 건 오직 나의 주관과 취향이다. 원하는 자료를 직관적으로 찾게 해줄 구조를 각자 그려볼 필요가 있다. 내 경우 우선 작가별로 저작을 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의 책을 그렇게나 많이 사들였다는 사실은 이번에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결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컬렉션들을 서로 가깝게 배치했다. 덕분에 제임스 설터, 줌파 라히리, 윌리엄 트레버 등의 소설과 에세이가 모인 고즈넉한 마을이 만들어졌다. 다루는 주제나 장르에 따라 책을 묶기도 했다. 트루먼 커포티의 논픽션 <인 콜드 블러드>는 법의학 사례집인 <살인의 현장>과 전 FBI 요원의 섬뜩한 기록인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옆에 꽂아야 할 것 같았다. 아, 실종됐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집과도 이번 기회에 극적으로 재회했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은 미야베 미유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등과 함께 미스터리 타운의 입주자가 됐다.

처분하기 전, 페이지 사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게 좋다.

과거의 내가 만 원권 몇 장을 책갈피에 끼워 뒀다가 잊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용돈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예전 직장의 명함 몇 장과 십수 년 전의 사진들을 찾아내기는 했다. 어쨌든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굳이 부록으로 끼워줄 필요는 없는 개인 정보들이다.

팔 것인가, 기부할 것인가.

분가가 결정된 리스트는 중고 판매, 기부, 그리고 폐기용으로 다시 분류한다. 중고 거래의 경우, 여러 옵션이 있는데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 유통망을 이용하는 게 아무래도 편리하긴 하다. 전용 앱을 열고 바코드를 인식시키면 판매 가능 여부 및 거래 가격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70여권을 되팔아서 108,100원을 벌었다. 애초에 투자한 금액을 생각하면 ‘벌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 싶기는 하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니까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서점 거래가 불가한 책 가운데 일부는 기부를 할 수도 있다. 인근에 지점이 있다면 아름다운 가게( http://www.beautifulstore.org/)를 이용해볼 만 하다. 요청한다면 연말정산 때 증빙이 될 기부영수증을 발행 받는 것도 가능하다. 국립중앙도서관도 책다모아(http://www.nl.go.kr/sun/)라는 서비스를 통해 도서를 기증받는다. 미소장 국가 장서 발굴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며, 중복 자료의 경우 정보소외기관에 재기증을 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부처는 번듯한 쓰레기통이 아니다. 훼손이 심하거나 굳이 돌려볼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책들은 과감히 폐기하는 게 맞다.

중고책거래 영수증 중고책 거래의 성과. 108,100원의 소득과 바닥까지 늘어지는 영수증.

어떻게든 빨리 없애는 것만이 답일까?

물론 중고 시장에서는 신간일수록 거래가가 높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값이 떨어지기 전에 내다 팔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식이라면 애초부터 지갑을 열지 않는 게 가장 경제적인 선택일 테니까. 게다가 여기저기서 기업형 중고 서점의 급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출간된 지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책이 활발하게 재거래되면서 전체 판매량을 잠식하는 게 출판사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현상은 아니다. 애초에 헌책방은 시장에서 사라져 더 이상 찾기 힘들어진 책을 발굴하는 재미에 방문하는 공간이었다. 출판 생태계의 건강이 염려된다면 신간을 처분할 때는 좀 더 신중해져도 좋겠다.

보지 않을 책이라면 처음부터 사지 않는 게 맞겠지만.

예전부터 서점에서는 지갑이 큰 갈등 없이 열렸다. 옷이나 술에 돈을 쓰는 게 소비라면 책을 사는 건 문화생활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허영심 때문에 보지도 않을 품목들로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는 거다. 그래도 혹시 미래의 내가 갑자기 케네스 브램튼의 840 페이지짜리 건축 이론서인 <현대 건축 : 비판적 역사>를 꺼내 읽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곤도 마리에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정곡을 가격한다. “언젠가 읽을 것 같은 책은 영원히 안 읽게 된다!” 물론이다. 모른 척하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서재가 다시 엉망이 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충동구매를 자제해야 할 거다. 나조차도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다짐이기는 하지만.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