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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자리

2019. 04. 08

영화감독 김종관은 이야기가 담기는 작품 속의 공간을 신중하게 고른다.
그런데 그의 신작을 볼 수 있는 곳은 극장이 아니다.

Writer 정준화 : 디지털 기획자. 틈나는 대로 영화, TV, 책, 전시 등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쓴다.

김종관 감독1

현재, 영화에 관한 담론이 가장 치열하게 오고 가는 공간은 어쩌면 극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틴 스콜세지는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를 주연으로 한 신작 <아이리시 맨>을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할 예정이다. 한편 스티븐 스필버그는 넷플릭스 영화가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되는 건 부당하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새로운 변화가 열어준 가능성과 그로 인해 흔들리게 된 전통 사이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하는 중이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등을 만든 영화감독 김종관의 경우, 일단은 긍정적인 가능성에 좀 더 주목하는 눈치다. 곧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페르소나>는 네 명의 감독이 한 명의 배우를 주연으로 완성한 단편 네 편을 엮은 프로젝트다. 김종관 외에 이경미, 임필성, 전고운이 연출자로 참여했고 가수 아이유로 더 잘 알려진 배우 이지은이 차례로 이들과 호흡을 맞췄다. “흥행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인 장편에 비해, 단편은 창작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서 무척 매력적인 작업입니다. 다수의 단편을 만든 경험이 저라는 창작자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어렵다는 한계가 늘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셈입니다.”

시리즈를 닫는 마지막 에피소드로 배치가 됐지만 사실 김종관의 <밤을 걷다>는 네 편 중 가장 먼저 시나리오 집필과 촬영을 완료한 작품이다. 연인인 듯한 남녀가 어둠이 내린 골목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흔히 기대할 법한 달콤한 밀어와는 거리가 멀다. 김종관은 이지은과의 첫 미팅 이후에 지금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고 말한다. 무대 아래의 쓸쓸하면서도 강한 표정을 엿봤다고 느꼈고, 그때 받은 인상에 죽음, 기억 등 평소 작품을 통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관심사를 보태 시나리오를 썼다. “배우를 중심에 둔 프로젝트인 만큼 소통이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배우가 동의하지 못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신중하게 교환했습니다.” <페르소나>의 제작 발표회에서 이지은은 김종관의 시나리오에 대해 “단편 소설처럼, 묘사하는 분위기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다”라고 말했다. “감독님 특유의 감성과 함께, 저라는 사람이 그 안에 분명히 담겨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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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걷다>는 죽음과 기억, 그리고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종관은 꿈이라는 소재를 자주 다루는데, 감독 자신이 실제로 꿈을 많이 꾸고 왜 그러한 꿈을 꾸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꿈은 현재 느끼는 결핍이나 품고 있던 의문을 새삼 돌이켜 보게 해주는 무의식의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하나의 작업을 마칠 때마다 항상 스스로에게 다음 작품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돼요. 매번 한계를 느끼고, 다음에는 그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소재나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다루게 되는 것도 그러한 고민의 일환이 아닐까 싶어요.” 그는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직하고 성실하게 발전시켜 가는 것도 창작자에게는 중요한 숙제라고 믿는다. 누군가는 동어반복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김종관에게 그의 필모그래피는 떳떳하게 치열한 진화의 기록이다.

이지은은 <밤을 걷다>의 촬영이 그 자체로 꿈을 꾸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신기할 정도로 습도가 낮고 쾌적했던 며칠 간의 여름밤은 도시의 소음 대신 풀벌레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제작진은 세상의 고요한 틈 사이로 파고든 듯 비현실적인 감흥을 공유했을 것이다. 영화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는 로케이션도 큰 몫을 했다. 종묘의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순라길은 김종관이 평소 친구들과 즐겨 찾던 산책로였다. 아직까지는 공격적인 변화가 미치지 않은, 호젓하고 고즈넉한 풍경이다. 여행을 가면 플리마켓에서 누군가의 손이 탄 물건을 잔뜩 고르게 된다는 감독의 취향은 그가 선택한 촬영 장소에서도 고스란히 읽힌다. 김종관은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보고 자랐던 강북의 오래된 장면들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다.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게 서울의 중요한 매력이긴 합니다만 저는 어쩔 수 없이 바뀌어가는, 그래서 위태롭게 느껴지는 풍경에 더 주목하게 돼요. 사라져가는 오래된 공간들에 대한 기억을 충분히 남겨보고 싶습니다.” 그가 영화라는 타임캡슐에 담아둔 서울의 기억들에 관해 좀 더 이야기를 청했다.

<밤을 걷다>의 순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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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산책은 실제의 동선 대로 진행된다. 순라길에 가면 주인공들의 대화가 시작되는 골목, 둘이 휴식을 취하는 야외 테이블,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길 위를 순서대로 걸어볼 수 있다. 김종관은 거대한 사당인 종묘와 맞닿아 있는 순라길의 밤에는 죽음을 연상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꿈속의 기억인 동시에, 죽음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최악의 하루>의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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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공간에 비일상적인 순간이 스며들면서 만들어지는 판타지의 연출에 관심이 많아요.” 세 명의 남자와 크고 작은 사건을 겪게 되는 주인공의 하루치 여정을 그린 <최악의 하루>는 수평(서촌)과 수직(남산)의 지형을 대비시키며 긴장감을 조율하고, 낮과 밤의 경계를 기준으로 이야기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작품이었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일상의 흔적도 어둠 속에 묻혀버린 뒤의 남산은 은밀하게 환상적인 공간이 된다.

<아무도 없는 곳>(가제)의 시티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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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가 공개되기도 전에 김종관은 이미 다음 장편의 촬영을 마쳤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될 <아무도 없는 곳>(가제)은 한 소설가와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연우진이 주연을 맡았고, 이지은도 다시 한번 감독의 출연 요청에 응했다. 두 배우가 대화를 나눈 시티커피는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의 지하상가에 자리 잡고 있다. 내부의 풍경은 몇 십 년의 세월이 고여 있는 듯 느리고 예스럽다. 감독은 대단히 한국적이어서 오히려 이국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쓸쓸한 멋을 간직한 공간 같았다고 이곳의 첫인상을 되새긴다. “밤이 되면 지하상가 전체의 셔터가 내려가서 내외부의 출입이 아예 차단돼요. 아무도 없는 공간에 우리만 남아서 영화를 찍고 있으려니, 마치 유령이 된 듯한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사진 : 박용하(인물) / 김종관, 미스틱스토리, 넷플릭스(영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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