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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er Engine

2017. 10. 11
신동헌 얼굴 일러스트

Writer 신동헌 :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 자동차 전문 블로거 ‘까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평 대향 엔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흔치 않은 형식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다.

박서 엔진. 이름부터가 멋지다. 직렬 4기통이나 V형 6기통처럼 듣자마자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어서 더 그렇다. 수평 대향 엔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흔치 않은 형식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매우 사랑하는 것 중 하나다.

페라리의 박서 엔진 사진 Ferrari 212 E Montagna의 박서 엔진
권투선수가 양주먹을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고 가슴 두근 거리지 않는 남자가 있으랴.

엔진이란 쉽게 말하자면 연료와 공기가 섞여 폭발하면서 발생한 에너지에 밀려 피스톤이 왕복 운동을 하면, 그 힘을 다시 회전 에너지로 바꾸어주는 장치다(고등학교 공업 시간에 졸았다면 어려울 수도 있다). 이때 피스톤은 엔진 형식에 상관없이 대부분 상하 운동을 하는데 V형 엔진이라 해도 각도가 조금 달라질 뿐 피스톤이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내려간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박서 엔진은 ‘수평 대향’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스톤이 수평으로 움직인다. 다른 엔진처럼 아래위가 아니라 피스톤이 옆으로 누운 채 좌우로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다. 양쪽에 위치한 피스톤의 움직임이 마치 권투 선수가 양 주먹을 맞부딪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박서(Boxer)’다.

빨간 포르쉐의 뒷모습

이 엔진이 특별한 이유는 피스톤이 서 있지 않고 누워 있는 구조 덕에 무게중심이 낮아서다. 다른 어떤 엔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게중심이 낮아서 안정감 있는 주행이 가능하다. 그뿐이 아니다. 이 엔진은 프로펠러 비행기에도 많이 사용되는데,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무게중심이 낮건 높건 별 상관이 없다.

파란색 토요타 86, 스바루 BRZ의 엔진 모습 특별히 강력한 엔진을 싣지 않더라도 무게 중심만 낮으면 훌륭한 스포츠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토요타 86 / 스바루 BRZ

그런데 이 엔진을 사용하는 이유는 회전할 때 잔 진동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스톤이 폭발과 함께 왕복 운동을 하면 진동이 많이 발생하는데, 박서 엔진은 양쪽 피스톤이 서로의 진동을 상쇄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진동 대책을 위해 엔진 케이스를 두껍게 만들 필요도 없고, 다른 엔진 방식보다 몸체에 조립하는 것도 좀 더 수월하다. 이와 같은 전문가적 분석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박서 엔진을 싫어할 수는 없을 텐데, 왜냐면 소리가 아주 멋지기 때문이다. 푸르륵거리듯 돌아가는 특유의 회전 감각, 메마른 듯 건조한 배기음은 다른 엔진과는 조금 다른 매력을 뽐낸다.

아마도 자동차 마니아는 ‘그럼, 대단한 엔진이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중 실제로 이 엔진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박서 엔진’ 하면 포르쉐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엔진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은 의외로 칼 벤츠다. 벤츠 역사를 꿰고 있는 사람이라면 직렬 엔진과 V형 엔진, DOHC와 SOHC, 터보와 자연흡기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다양한 시도를 했던 그들의 역사를 복기할 수 있겠지만, 박서 엔진이 장착된 벤츠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마차처럼 생긴 옛날 벤츠 벤츠의 역사를 꿰고 있는 사람도 박서 엔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생겼던 시대의 벤츠에 사용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걸 ‘자동차’로 인식하지 않으니까. 1899년 1월2일, 프랑크푸르트-쾰른 레이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벤츠 8hp 레이싱카는 2280cc 2기통 박서 엔진으로 이름처럼 8마력을 발휘했다.

칼 벤츠는 1896년에 박서 엔진을 개발해 특허를 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게중심이 낮고, 진동이 적어서 기계적 완성도가 낮은 초창기 자동차에는 유리한 점이 많아 승용차나 레이싱카는 물론이고 상용 트럭에도 이 엔진을 즐겨 사용했다. 사용 차종이 20여 대에 달하는데도 벤츠의 박서 엔진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박서 엔진의 생산을 종료한 시점이 1902년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자동차 수요가 늘어나면서, 벤츠는 박서 엔진보다 좀 더 생산이 간단한 병렬 2기통과 직렬 4기통을 사용하기로 했다.

페라리의 테스타로사 모델 페라리의 대명사 중 하나인 테스타로사도 베를리네타 박서 중 하나다. 메마른 듯한 특유의 배기음이 V형 엔진과는 다른 개성을 뿜는다.

페라리가 박서 엔진을 만들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지만, 페라리에게 박서 엔진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 엔초 페라리는 대체로 자신의 고객들을 믿지 못했다. 그들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엔초 페라리는 그들을 대표하는 V12 엔진을 미드십으로 실으면, 일반 운전자들이 감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스에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결국 로드카에도 미드십 12기통을 싣기로 했다. 페라리 엔지니어들은 어떻게든 안정적인 거동을 보일 수 있도록 무게 중심을 낮추려 했고, V12기통을 눌러서 평평하게 편 형태의 ‘플랫 12기통’을 만들었다. 원래 박서 엔진은 대향하는 두 개의 피스톤이 서로 주먹을 맞부딧치듯이 움직이지만, 이 엔진은 V형 12기통에 기반을 두고 제작돼 대향하는 피스톤이 와이퍼처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때문에 수평대향 엔진이라고 해도 엄밀히 따지면 박서 엔진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페라리 자신이 ‘ 베를리네타 박서(박서 엔진을 장착한 쿠페)’라고 부르고 있으니 박서 엔진이라고 할 수밖에. 1973년부터 1984년까지 계속된 BB(베를리네타 박서)의 시대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페라리의 황금기로 꼽힌다.

포르쉐 911의 엔진 프라모델 포르쉐 911 박서 엔진 - 얼마나 사랑받는지, 자동차도 아니고 엔진 플라모델이 나와있을 정도다.

물론 포르쉐의 박서 엔진도 빼놓을 수 없다. 현존하는 가장 매력적인 박서 자동차 엔진이며, 진화를 거듭하면서 효율성과 성능을 동시에 충족하는 몇 안 되는 엔진이다. 도무지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스포츠카에 대해 논하려면 911이건 박스터건 좋으니까 꼭 경험해봐야 한다. 우주인이 만들었다고 칭송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bmw r1200 모터사이클의 엔진

그러나 정말 ‘엔진’을 맛보고 싶다면, 모터사이클이 좋은 선택이다. 자동차보다 가격대가 훨씬 낮아질 뿐 아니라 다리 사이에 직접 엔진을 끼우고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박서 엔진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BMW는 1932년에 만든 최초의 모터사이클부터 박서 엔진을 채택해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다.

사실은 1970년대 말에 박서 엔진 사용을 중단하고 효율성과 성능이 더욱 뛰어난 4기통으로 이행할 계획을 세웠는데, 엄청난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모터사이클을 타면 자동차에서는 느끼기 힘든 ‘낮은 무게중심’도 분명히 체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좌우로 툭 튀어나온 엔진의 존재감이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게다가 자동차계에서는 가장 늦게까지 공랭을 유지한 포르쉐와 마찬가지로 BMW는 여전히 공랭식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환경 규제 때문에 공랭식 박서 2기통 엔진을 만들려면 더 많은 개발 비용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종하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이 엔진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 수 있다.

BMW
BMW 바닥에 깔려서 돌아가는 것처럼 안정적인 ‘저중심’을 체감할 수 있다. 게다가 배기음은 귀 뒤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는 가랑이 사이에서 들린다. 흥분하지 않을 수 있나.

R9T 어반 GS는 최근 선보인 레트로 모터사이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클래식 모터사이클 열풍에 대한 BMW의 화답이다. 요즘 바이크답지 않은 박력 있는 배기음만 봐도 공랭 박서 엔진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이 바이크의 목적임을 잘 알 수 있다. 성능이나 효율성이 전부인 세상에서 박서 엔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취향’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가을 날씨에 박서 엔진이 공기를 빨아들이며 내는 소리는 꼭 들어봐야 한다. 첫사랑 소녀가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마실 때 나던 그 소리만큼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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